1. 프로필
2. 개요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 중앙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국명은 국토를 남북으로 관통해서 흐르는 파라과이 강(Paraguay River)에서 유래한다.
과라니어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강 이름이었다는 점에선 우루과이와 비슷하게 지어진 국명인데, 파라과이와 우루과이 모두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과라니어로 'para'는 '강', 'y'는 '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강이나 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수도는 위성도시까지 합치면 전체 인구의 40% 정도가 거주하는 아순시온(Asunción)이다.
국토 면적은 40만 7,000km²로 내륙국에다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서 크기가 작아 보이지만 이래봬도 독일보다도 큰 면적이다.
인구는 2015년 CIA 기준 6,783,272명.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사바나 대평원인 그란차코(Gran Chaco)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다.
공용어는 과라니어와 스페인어다.
화폐 이름도 과라니일 정도인데 아메리카 원주민 과라니족의 피가 많이 섞였기 때문이다.
파라과이 국기는네덜란드 국기에 문장을 새겨놓은 듯한 모양인데, 국기 가운데 문장의 앞뒤를 구별해야 한다.
3. 자연
남아메리카 중앙 한복판에 위치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볼리비아와 함께 둘 밖에 없는 내륙국이다.
국토 전체가 라플라타 강 수계에 속하며, 국토의 정중앙을 파라과이 강이 가로지르며 서쪽 국경으로는 필코마요 강이, 동쪽 국경으로는 파라나 강이 흐른다.
파라과이 강 동쪽으로는 언덕들이 많은 반면 파라과이 강 서쪽은 광활한 그란차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파라과이 강은 수운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다.
수도 아순시온은 파라과이 강과 필코마요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아르헨티나 포사다스와 접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아순시온 시에는 52만 명이, 그리고 아순시온 외곽 지역을 포함하는 수도권인 센트랄 주에는 207만 명이 거주해 인구의 약 37%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
외국은 대게 행정구역을 무시하고 생활권으로 도시를 구분하기에 207만 명의 센트랄 주 인구를 아순시온 인구로 간주한다.
파라과이 강 동쪽은 대체로 해발고도가 낮지만 브라질 고원의 맨 끄트머리라서 여러 언덕들과 몇몇 산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고봉인 세로 트레스 칸두(Cerro Tres Kandú) 봉은 해발 842m이다.
한편으론 동부 지방엔 이과수(Yguazú) 댐이나 야시레타(Yacyreta) 댐을 비롯한 여러 댐들이 위치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세계 최대의 수력 발전소인 이타이푸 댐이 브라질 국경을 흐르는 파라나 강에 위치해 있다.
워낙 댐의 규모가 크다보니 전력 생산량이 엄청나서 공급이 소비를 한참 뛰어넘어서 전력 생산량의 85%를 브라질에 수출할 정도다.
다만 전력 자체는 풍부하지만 공급망이 좋지 못해서 정전 등은 빈번히 일어난다.
진짜다.
아순시온 대정전 사태가 가끔 뉴스에 나오고는 한다.
수도 아순시온을 포함해 파라과이 인구의 97%는 파라과이 강 동쪽에 거주하고 있다.
일자리와 기반시설 및 상업/여가 거리가 수도 아순시온에 주로 몰려있는 편이다.
파라과이 강 서쪽은 차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인 그란차코 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대체로 평평하고 여러 강들이 흘러 습지가 많은 편으로 람사르 협약 등록지인 리오 네그로 습지(3,700km²)나 티푼케 습지(2,800km²)처럼 매우 큰 습지들도 분포한다.
파라과이 강 서쪽의 그란차코 평원은 한반도보다 넓은 파라과이 국토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해 인구가 극히 희박하다.
파라과이의 기후는 파라과이 강 동쪽은 주로 아열대기후(Cfa)를, 서쪽은 주로 사바나기후(Aw) 내지 스텝기후(BSh)를 띈다.
수도 아순시온의 경우 연평균기온은 22.7℃로 동아시아에서는 대만 타이베이와 비슷한 정도이며, 7월 평균기온은 17.6℃, 1월 평균기온은 27.5℃로 여름이 더운 편이고 겨울 기온도 15도 안팎의 홍콩, 마카오, 타이베이보다 훨씬 높고 가오슝과 비슷하다.
서쪽 사바나 그란차코 지역은 기온이 좀 더 높은 편이다.
강수량은 겨울보단 여름이 많은 편으로, 지역별로 편차가 있다.
파라과이 동쪽의 강수량은 대체로 1,000mm를 넘는 편으로 수도 아순시온의 경우 연강수량이 1,401mm 정도이지만, 서쪽의 그란차코 지역의 강수량은 500-1,000mm 정도로 적은 편이다.
4. 행정 구역
파라과이의 1차 행정 구역은 17개 주(departamento)와 아순시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주 아래에는 약 260여개의 지방자치단체(municipios)들이 존재한다.
5. 역사
파라과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 인디언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과라니어를 사용하면 물건 값을 깎아주기도 한다나. 하지만 진짜 과라니족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스페인인 혈통 백인과 과라니족의 혼혈인 메스티소인데도 국민의 90%가 과라니어를 할 줄 안다.
이는 파라과이가 독립 당시 자국민의 혈통 전반에 섞인 과라니 부족들의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띄운 덕이다.
잉카문명이 발달한 안데스 산맥 일대가 아닌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변방지역이 그렇듯 대항해시대와 스페인인들의 식민지 개척 이전에는 뭐하고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36년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 때 스페인 왕실이 이탈리아인 탐험가들로 구성된 원정대를 과라니 부족 지역을 탐사하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과라니족은 백인들의 통치를 전면거부했으며 1607년에는 과라니족 인디언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친 스페인 제국 정부는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파라과이의 통치를 맡겼다.
파라과이에 있는 에수회의 레둑시온(reduccion)들은 제국의 핵심적인 은 광산이 있던 페루의 안데스 산맥 지대와 경계를 맞댄 동부 지역을 지키는 과제를 수행했다.
스페인인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이 지역을 특히 브라질 남부의 상파울루에서 온 팽창주의적인 노예사냥꾼(파울리스타Paulista)에게서 지키는 임무였다.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350~1750다.
예수회는 16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의 마을인 '레둑시온(reduccion)'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콩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 예수회의 레두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의 수출로 국제무역의 강호로 떠올랐다.
이런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의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 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했다.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이에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세기~18세기의 레두시온 체제는 신앙을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 역사상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그래서 실제 주민들은 메스티소임에도 인디언 언어인 과라니어가 아직도 널리 쓰인다.
아즈텍, 마야 인디언이 원주민인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만 쓰이고 역시 잉카문명 인디언이 원주민인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에서도 아이마라어 등 잉카 언어는 소멸 직전까지 갔으며 미국과 캐나다 등 앵글로아메리카도 인디언 언어 대부분이 유실되고 영어가 국어로 쓰이는 걸 생각해보면 아메리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민지 생활이 계속되던 중,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1814년부터 1840년까지 파라과이는 이른바 "영원한 독재자"라는 별명을 받은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박사의 독재를 받게 되었다.
호세 박사는 파라과이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의 제위기간 동안 파라과이와 외국 사이의 여행이나 우편은 상당한 수준의 통제를 받았다.
파라과이로 유입되었던 외국인 상당수가 마치 전근대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파라과이에 정착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호세 박사는 독립 이전 파라과이에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예수회 시설 및 성당들을 공격하여 약화시키고 대신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군국주의 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그가 프로이센으로부터 모방한 징병제는 삼국전쟁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과의 체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초반 만큼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되었다.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과거 브라질이 가져간 파라과이의 유물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1870년 이전의 파라과이의 역사 유물들은 없다.
6. 3국 동맹 전쟁
3국 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은 해당 항목 참조. 이 작은 나라가 대담하게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3국 동맹군과 맞장뜬 전쟁이다.
앙숙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 뭉게는 데 적극 협조했을 정도로 파라과이가 노골적으로 두 나라를 자극하여 자초한 자업자득이었고 당연하지만 국력 차이가 커서 밟혔다.
이 전쟁 후반기에 아순시온에 있는 파라과이 국립 기록 보관소가 브라질 제국군에게 죄다 털려서 모든 문서, 역사서 기록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국립도서관(Biblioteca Nacional do Brasil) 지하창고에 150년이 넘도록 짱박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브라질 측 역사학계가 이 역사서 기록들에 손대고 연구한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거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절,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의 레두시온 체제, 파라과이 건국사, 3국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 등 정치사,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파라과이 전쟁까지의 역사 기록이 꽤 부실하며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파라과이 현지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는 객관적이 아닌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걸 감안해서 봐야 한다.
양쪽을 모두 비교해가면서 볼 경우 곳곳에서 역사 왜곡, 프로파간다, 흑색선전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해결하는건 현 브라질 정부에서 문서들을 공개하거나 파라과이 정부에게 반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문제는 브라질 정부가 파라과이에게 돌려준 극히 일부 문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문서들을 도서관 지하에 짱박아두고 공개하지를 않고 있어서 연구가 어렵다.
그나마 부분적으로는 용케 칠레 등으로 빼돌린 것들이 조금씩 있어 칠레 대학들이나 멕시코 UNAM대학 등이 연구하기도 한다.
7. 그 후
3국 동맹 전쟁 패전 이후 파라과이의 경제와 사회는 초토화되었으며 돈이 없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재건을 위해 국가소유였던 토지를 팔아 넘기면서 불평등이 매우 심각해졌다.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선 콜로라도당과 자유당의 양당이 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수당인 콜로라도당이 집권했으나 1904년 반란으로 자유당이 집권한 이후로는 자유당이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다만 자유당 집권기 동안에도 내란이 빈발하면서 정치가 안정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이때 파라과이는 인구구조도 막장이었는데 전국민의 90%가 여성인 엄청난 여초국가가 되었다.
인구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가임기 인구에서는 실제로 9:1도다도 더 극단적인 성비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는데, 살아남은 남성의 상당수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노인이나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길거리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강간이 일상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었으며 파라과이가 정부차원에서 남성인 볼리비아 등 주변국 출신 노동 이민자들에게 자기네 나라로 귀화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런 후유증으로 인해 파라과이는 1950년대까지 일부다처제를 해야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당시 사회에서 거의 어쩔 수 없다싶이 정립된 여러가지 남성 우월주의적인 인습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파라과이를 괴롭히고 있다.
백수십년이 지나도 전쟁의 상흔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셈.이후 파라과이는 1932년~1935년 간 볼리비아와 그란차코 지방 일부인 차코 보레알 지방을 두고 차코 전쟁(Guerra del Chaco)을 벌이게 된다.
이 전쟁 당시 국제적으론 볼리비아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볼리비아는 인구도 3배가 더 많았으며 극단적인 여초국가가 되어버린 파라과이를 감안하면 병력은 아예 넘사벽으로 볼리비아가 더 많았으며 땅도 훨씬 넓고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장비와 무기도 더 우수했으며 1차 세계 대전 및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독일 장군 한스 쿤트(1869~1939)가 군사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라과이군 지휘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1880~1940)는 차코 보레알 지방에 석유가 많은 것 같으니 해외 석유기업들의 자본 지원을 요청했고 바로 네덜란드 쉘이 이 지역 석유 개발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장비 자금을 제공했다.
미국도 질세라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같은 조건을 요구해 이른바 정유업체 전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우선 저지대 늪지가 많은 차코 보레알 지방 특성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들을 군인으로 고용했으며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로 전투를 벌여 큰 효과를 거뒀다.
또한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의 무선 감청과 암호문 해독을 막으려고 스페인어 대신 과라니어로 무선 통신을 진행하고 암호문도 과라니어로 작성하며 심지어 병사들의 대화도 과라니어로만 쓰게 만들었다.
결국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볼리비아도 고전했지만 전쟁 말에는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더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컸는데 전쟁을 피하고자 차코 보레알 지역 난민이 아르헨티나로 계속 오는 통에 신경쓰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겉으론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전쟁을 안 끝내면 아르헨티나도 전쟁에 끼어들어 두 나라 다 묵사발 내겠다고 으름장을 내놓았는데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으뜸가는 경제 및 군사 최강국이기에 두 나라 모두 아르헨티나에 맞서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휴전협정을 맺는다.
전투는 1935년에 끝났지만 여러 번의 회의 끝에 전쟁은 1938년에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종결된다.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3/4을 손에 넣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유역 및 푸에르토카사도 지역을 얻어서 어느 정도 땅을 확보했지만 전쟁 피해가 훨씬 컸기에 전쟁 중에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나고 사령관도 여럿 교체될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전술적 승리및 이득은 파라과이가 더 컸기에 볼리비아는 전후 처리에 골치를 겪는다.
볼리비아는 안 그래도 칠레에 안토파가스타 주를 뺏겨 내륙국으로 전락했고 브라질에는 고무 생산지 아크레 주를 털린 데 이어 최약체인줄 알았던 파라과이에까지 털려버려 싸움 더럽게 못 하는 나라로 완전히 찍혀버렸다.
몇 번의 쿠데타 끝에 치러진 1939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티가리비아가 자유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겨우 1년만에 영토 순방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라과이에선 자국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으며 그를 기렸다.
그런데 웃기게도 전쟁이 끝나서 가장 좋아라하던 이들 중 하나인 쉘은 얼른 차코 보레알 지방에서 석유가 진짜 나오는지 탐사를 시작했지만 끝내 석유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에스티가라비아가 원조를 얻고자 뻥을 친 것이었다.
암튼 에스티가리비아의 사망으로 국방부장관 이히니오 모리니고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모리니고는 콜로라도당과 손잡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 또는 나치즘식 독재정치를 추구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정지하고 자유당의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이 모리니고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는 총파업과 학생들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에 모리니고 대통령은 완화책으로 1946년 정치활동을 합법화하여 야당인 2월당과 여당인 콜로라도당으로 구성된 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2월당원은 1947년 초에 모리니고에 반발하면서 연립내각을 파기했고, 그러자 이에 격노한 모리니고 대통령은 콜로라도당만을 지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2월당원은 자유당 및 파라과이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차코 전쟁 후 쿠데타로 잠깐 집권했던 라파엘 프랑코를 리더로 하는 반란군으로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파라과이 내전이라고 부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전부터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군대도, 해군의 거의 전체와 육군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다.
육군사령관이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면서 모리니고는 반격에 나섰고, 결국 압도적으로 1947년 8월에 반란군을 해산시키며 승리했다.
이후 파라과이는 야당이 불법화되면서 1당 독재 국가가 된다.
그렇게 파라과이 내전은 끝나고, 콜로라도당의 집권체제가 이어졌는데 당시 최고 지휘자였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1954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페데리코 차베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콜로라도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파라과이의 경제개발을 추진함과 동시에 반대자에 대한 인권탄압과 권력기반 유지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후안 페론과 소모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니카라과에서 축출되고 미국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을때 받아들이기도 했고 1970년대-1980년대 더러운 전쟁이 펼쳐졌을 당시에 미국 CIA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농지 문제에 있어서는 말로는 토지개혁을 한다해놓고 지지계층에게 차별적으로 농지를 나눠주다시피해서 빈농들과 원주민들을 외지로 쫓겨나게 만든 결과를 낳았으며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미국이 애써 모른 체 하면서 35년간 장기집권하였고 1980년대 남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민주화 열풍이 불었을 때에도 1988년에 8번째 대통령직에 오른 스트로에스네르는 1989년에 오른팔 안드레스 로드리게스에 의한 쿠데타로 축출되어 브라질로 망명했고 거기서 죽었다.
2006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한 그의 시체는 파라과이 정부가 인도를 거부하여 지금도 브라질의 공동묘지에 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의 유산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파라과이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수의 지배계층이 토지를 거의 독차지하는 문제도 스트로에스네르와 관련이 있고, 민주화 이후로도 해결이 전혀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로도 장기집권한 콜로라도당의 의원들 상당수가 이러한 토지문제와 관련이 있는데다가 그나마 토지개혁을 중점에 둔 루고 대통령도 임기 1년을 앞두고 탄핵당하는 일까지 겹쳐져서 앞으로도 해결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콜로라도당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과거 스타플레이어인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1999년 자국에서 코파아메리카가 열렸을 때 우리나라에는 미국 거지보다 못사는 550만 인구가 살고, 미국 부자보다 잘 사는 20만명 부자가 산다.
그런 부자들 이득을 대변하는 오비에도 정권을 찬양할 결과를 만들고 싶지 않다.
라며 보이콧을 선언해 출전조차 안 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