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출생 : 1942년 6월 5일 (80세),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거주지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양아파트
본관 : 밀양 박씨
재임기간 : 제36대 문화관광부장관, 1999년 5월 23일 ~ 2000년 9월 19일, 제25대 대통령비서실장, 2002년 4월 15일 ~ 2003년 2월 24일, 제35대 국가정보원장, 2020년 7월 29일 ~ 2022년 5월 11일
부모 : 아버지 박종식
형제자매 : 3남 1녀 중 막내
배우자 : 이선자
자녀 : 슬하 2녀
학력 : 문태고등학교 (졸업)광주교육대학 (초등교육학 / 전문학사)단국대학교 상경대학 (상학 / 학사)
병역 :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요셉)
소속 정당 : 무소속
의원 대수 : 14, 18, 19, 20
별명 : 아이즈원, 목퓨리, 목포 김기춘(목기춘) 등
경력 : 럭키금성상사 근무동서양행 뉴욕지사장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제16대 뉴욕한인회 회장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21번)민주당 수석부대변인민주당 대변인민주당 당무위원새정치국민회의 기획조정실장새정치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대통령인수위원회 위원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제36대 문화관광부 장관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대통령비서실 정책특별보좌관제25대 대통령비서실장제18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민주당 원내대표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제19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민주통합당 원내대표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제20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국민의당 원내대표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국민의당 대표민생당 상임고문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광주김대중컨벤션센터 이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사업회 이사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부이사장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제35대 국가정보원장
2.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관료
3. 생애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박종식(朴鍾殖, 1910년 ~ 1948년)으로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4. 재미 사업가
194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진도에서 목포로 이주해서 문태고등학교, 광주교육대학, 단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 대학 졸업 후 럭키금성상사, 동서양행 등 기업에서 근무했다.
이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피혁과 가발 수출 사업을 운영하면서 80년대 초 뉴욕 한인회장과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맨해튼에 투자를 해서 건물 5채를 매입할 정도의 자산가였고, 이 재산이 이후의 정치 생활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박지원은 당시부터 정계 진출에 꿈이 있었는데, 그래서 만났던 사람이 놀랍게도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었다.
박지원은 전경환과 가깝게 지냈고, 실제로 1981년 11대 총선 당시 전경환의 도움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고 했었으나 해외교포라는 결격 사유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러던 중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을 김경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박지원은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전해들은 뒤, 통렬하게 반성했고, 그 후 김대중의 후원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김대중이 사면되자, 박지원 역시 미국에서의 사업을 모두 정리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5. DJ의 오른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등원하였다.
1996년에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는데, 그 당시 상대가 다름아닌 김문수였다.
하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대변인으로 대언론 소통창구를 맡았으며,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중용돼, 기존의 동교동계 가신들이 관여하기 어려운 부분에 뛰어들어 틈을 메꾸는 역할을 맡았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는 북한 측이 조의화환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 수신자 두 사람(임동원, 박지원) 중 1인이었을 만큼 DJ의 최측근으로 간주되었다.
2019년 서거 전까지 이희호 여사의 병세를 가장 먼저 관심갖고 지켜보는 입장일 정도로, DJ 사후에도 10년째 완벽한 DJ의 심복임을 행동으로 자처하고 있다.
6. 대북송금 특검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서 현대로부터의 150억 원 수뢰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SK그룹에서 7,000만 원, 금호그룹에서 3,000만 원을 받고(알선수재죄) 직권남용, 외국환거래법 및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과 추징금 1억 원을 선고받았다.
당시 2004년 최후진술에선 “입으로는 변화를 부르짖으며 관행에 젖어 잘못한 것은 처벌받겠다.
”고 했다.
대북송금사건 당시 구속되어있는 동안 지병인 녹내장이 악화되어 왼쪽 눈에 이어 오른쪽 눈을 실명할 뻔했다.
박지원 본인도 재판 당시 '남은 한쪽 눈마저 실명될 위기다'라며 선처를 호소하며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했고 받아들여졌다.
이후 집행정지와 재구속을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2007년 2월 사면을 받아 징역 3년 중 1년 5개월 정도를 채우고 출소하게 된다.
- 2003년 6월 18일 구속 후 2004년 2월 구속집행정지(8개월 구속)
- 2004년 3월 재구속 후 2004년 5월 4일 구속집행정지(2개월 구속)
- 2004년 6월 재구속 후 7월에 다시 구속집행정지(1개월 구속) 연속 2번
- 2004년 11월 2일 재구속 후 16일 다시 구속집행정지(14일 구속) 연속 2번에 2005년 3월에 보석
- 1년 뒤인 2006년 5월 25일 파기환송심 최종 선고로 재구속
- 2006년 11월 3일 형집행정지로 3개월 만에 석방(5개월여 구속)
- 2007년 2월 9일 석방된 상태에서 사면.
- 2008년 1월 1일 특별복권.
무려 구속집행정지 6번(10개월)에 형집행정지 1번(3개월)을 받았으며, 보석으로 1년 2개월 이상을 나와 있었기에 총 2년 3개월을 넘게 쉬었고, 이 기간의 대부분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거나 통원치료를 했다.
파기환송심 당시 언론이 구속집행 정지 기간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보도한 탓에 2년 정도 감옥에 있던 걸로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1년 반도 안 된다.
참여정부 시절 징역을 산 이후로는 친노 및 그 후신이라 볼 수 있는 친문계열 정치인들과 일정 거리를 두는 모습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술된 대로 박지원을 사면해 준 것은 노무현이기에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대통령 사면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도 징역을 살다가 풀려날 뻔했다.
근데 이미 당시 형집행정지 상태여서 사면 결정이 나기 전에 더 연장신청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사면을 안 했다면 언제 다시 감옥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7. 재기와 분당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장장 1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였다.
이후 통합민주당에 복당했다.
그리고 복당 인사에 당시 고작 재선에 불과했음에도 2010년 5월,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이후 2010년 7월 28일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당시 대표였던 정세균이 사퇴를 했고, 결국 임시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5월 민주통합당의 19대 첫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초대 지도부가 총선 패배로 인해 모두 사퇴한 상황이었기에 임시로 다음 전당 대회까지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또) 역임하게 되었다.
전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당선된 이해찬 대표와의 담합 의혹이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대선 패배 이후 원내대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참패하자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사임하고 뒤를 이었던 박영선 전 원내대표 겸 국민공감혁신위원장마저도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은 문희상 전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2015년 2월 8일에 열린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상임고문과 맞서 2위로 석패했다.
2016년 1월 22일에 민주당을 탈당하고, 3월 2일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입당키로…18번째 현역국민의당 합류 이후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당선되어 4선의 중진이 되었다.
2016년 4월 27일, 경기도 양평군에서 열린 국민의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인 워크숍에서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에 추대된 김성식 당선인과 함께 원내대표로 만장일치 합의추대되었다.
이로써 박 의원은 2010년 민주당(18대 국회), 2012년 민주통합당(19대 국회)에 이어 2016년 국민의당(20대 국회)까지 이례적으로 3번이나 원내대표를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6년 6월 29일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사퇴하였고, 박지원은 만장일치로 원내대표를 겸하면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6년 12월 5일 부로 김동철에게 비상대책위원장을 이임하였다.
곧바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하기 위해 원내대표직도 사임하였다.
그리고 2017년 1월 15일, 국민의당 전국당원대표자회의에서 1인 2표제, 당원 전체 투표로 200% 중 61.58%의 득표율, 국민의당의 2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인생 중 처음으로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식당 대표가 된 것이기도 했다.
과거 당 대표 직함은 비상대책위원장직이 전부였으니, 비록 국민의당이 원내 3당이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청년 시절 목표('야당 대표')를 이룬 원로의 정치인이 되었다.
2017년 5월 10일,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2기 지도부가 총사퇴를 결의하면서 박지원 본인 역시 당대표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