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필
출생 : 1968년 1월 13일 (54세), (정부 직할)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
국적 : 대한민국
본관 : 김녕 김씨
신체 : 165cm, 57kg, O형
가족 : 아버지 김성대(1939년)어머니 이선미(1944년 1월 16일)형 김경모, 남동생 김현모, 배우자 장지연(1981년생, 2019년 결혼) 장인 장욱조, 처남 장희웅
학력 : 서울신월국민학교 (1980 졸업)화곡중학교 (1983 졸업)화곡고등학교 (1986 졸업) 서울예술전문대학 (국악과 1986 / 전문학사)
종교 : 개신교
병역 : 대한민국 해군 해군홍보단 (314기) 수병 만기전역
소속사 : 건음기획
데뷔 : 1992년 정규 1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별명 : 국민가수, 한국의 스티비 원더, 김건반, 깜상, 연탄, 마른털, 쉰건모, 쉰둥이, 흑(黑)기사
취미 : RC카, 드론, 게임, 킥보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종이접기, 음주
2.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1990년대를 대표하는 대한민국 가요계 전설 중 한 명으로, 국민가수라는 타이틀이 전혀 손색 없는 대표적인 가수이다.
대한민국 최단 기간 최다 음반 판매량 기네스 기록 소유자이다.
골든디스크 최초 3회 연속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며, 1994년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와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까지 5대 가요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했다.
지상파에서 가요대상 시상이 사라진 현재 시점에서 이 기록을 보유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하다.
그야말로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사랑하던 가수.지상파 3사 연말 가요 시상식이 있던 시절 이에 근접한 기록을 가졌던 가수들은 1997년과 1998년의 H.O.T., 1999년과 2000년의 조성모, 2001년의 god 등이 있다.
H.O.T. 같은 경우에는 1997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했지만 KBS는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고, 1998년은 KBS, MBC, SBS, 서울가요대상(젝스키스와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는 김종환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된다.
조성모 같은 경우에는 1999년은 KBS, MBC,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핑클과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SBS는 핑클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되고, 2000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하였지만 KBS는 god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되고, 동시에 한 해 지상파 3사 그랜드슬램의 기록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된다.
god는 2001년에 KBS, MBC, SBS, 골든디스크를 석권했지만 서울가요대상은 바로 김건모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외에도 2005년의 김종국은 KBS, MBC, SBS 지상파 3사 대상을 동시에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 대상을 SG워너비가 수상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서울가요대상은 아예 개최되지 않았다.
그 외 2005년까지 뮤직비디오 위주 시상식이었던 MKMF에서도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을 동방신기,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드렁큰 타이거가 수상하면서 김종국은 2005년 지상파 3사 이외의 시상식에서는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대신 김종국은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최후의 그랜드슬램, 트리플 크라운 수상자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KBS와 MBC는 2005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시상식이 폐지되었고, SBS도 2006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더 이상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시상이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레전드 3인방 중에서 가장 후배지만, 1968년생으로 이제는 나이가 상당해서 가수들 중에 고참급이다.
핑계는 전국적으로 한국에 레게 음악이 유행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잘못된 만남은 역대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역사적인 기록을 올렸고, 그 외에도 히트곡이 즐비하다.
작곡가 윤일상은 자신의 책 <나는 스무살이다.
>에서 그가 음악적 능력에 있어서 조용필 다음으로 대단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수라고 평가했다.
3. 역량
"제가 우리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하는 가수 그러면 처음 꼽는 사람이 김건모예요"신승훈
"가장 존경하는 대한민국 뮤지션은 김건모 선배님"나얼
"김건모 선배님은 나의 롤모델"나윤권
보컬, 작곡, 편곡, 피아노 등 다방면으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갖춘 뮤지션. 하이톤의 까랑까랑하면서도 부드럽고 간드러지는 바이브레이션이 들어간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데뷔 때부터 주목을 받았고, 지금도 그의 목소리만 듣고 음색발이라며 보컬 실력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김건모의 노래를 불러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노래를 완벽히 소화하기에는 힘든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 2집 '혼자만의 사랑'의 인트로에서 3옥타브 도 음도 피아노 치면서 흔들림없이 라이브로 선보일 정도의 넓은 음역대에 뛰어난 가창 테크닉이나 특유의 음색과 창법이 더해져 국내 역대 보컬리스트 순위를 매길 때 항상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갖춘 보컬이다.
서울예술대학 재학 당시 천재로 불렸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영혼의 파트너 김창환이 옛날에 무릎팍도사에서 회고하기를 "너무 천재적이다보니 자기가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잘 모른다.
그는 스스로 노래 부르는 건 숨 쉬듯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때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 불렸을 정도로 스티비 원더 모창을 정말 비슷하게 한다.
단순히 목소리나 창법 때문이 아니다.
그만큼 역량이 받쳐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스티비 원더를 모창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
김조한과 같이 lately를 부른 영상도 있는데, 김조한이 아마추어로 보일 지경이다.
레게나 소울 방면의 창법에 능하며 초기 히트곡은 소울이었으나 점점 레게나 하우스 쪽으로 가다가 2000년대 들어서 소울이나 R&B로 방향을 틀었다.
신승훈과 함께 프로듀서 김창환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하나. 피아노 솜씨도 수준급이며, 많은 자작곡을 가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나가수 출연이나 각종 예능 활동 등으로 인해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김건모 앞에서 실력으로 고개를 뻣뻣이 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역대 가수 순위를 선정해도 언제나 열 손가락 안의 순위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올타임 레전드급으로 실력과 커리어를 가진 대가수다.
자작곡 중에선 본인의 히트곡도 꽤 많이 들어 있다.
나는 가수다에서 미션곡으로 선정되었던 미련과 사랑이 떠나가네는 둘 다 김건모가 직접 작곡한 곡이다.
4. 가수 활동
김건모의 음악 인생은 '김창환 사단'의 첨병으로 국민가수급 인기를 얻은 1집에서 3집까지의 전기, 김창환을 떠나 역량있는 솔로 아티스트로 성장했던 4집에서 6집까지의 중기, 대중성의 제고를 위해 최준영과 손을 잡고 다시 반등한 7, 8집 이후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5. 1~3집: 김창환 사단,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민가수
서울예대 86학번 국악과였던 김건모는 졸업 후, 같은학교 선배인 박미경의 소개로 프로듀서 겸 작곡ㆍ작사가인 김창환을 만나게 된다.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혹독한 프로듀싱을 받은 김건모는, 1992년 10월 무렵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타이틀로 1집 앨범을 발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오에서는 그의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뛰어난 노래실력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에,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음반판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에 TV프로그램에서도 섭외전화가 쇄도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는데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방송이 TV에 나오자 갑자기 음반판매량이 수직상승이 아닌, 수직하락을 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바로, 가창력과 음색에 비례하는 외모를 상상했던, 대중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상대적으로 못생긴 얼굴 때이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않고 계속해서 각종 오락프로그램에 열심히 출연하여 예능감각을 뽐냈고, 방송사를 오갈 때마다 타 가수와 직원들에게 꾸준히 인사하며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다져갔다.
결국 그는 멋진 외모가 아닌, 친근감과 가창력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 끌어모았고, 이로서 앨범판매량 또한 다시 상승하게 되었다.
덕분에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에서 이어지는 같은 앨범의 후속곡 첫인상이 1993년 11월 가요톱텐 5주 1위 골든컵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이것은 외모 공개 한 번 잘못했다가 묻힐 뻔 한 그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였으며, 데뷔한지 13개월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의 음악은 가요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음색과 노래였으며, 당시에만 해도 생소했던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힙합, 레게가 가미된 '흑인 음악' 그 자체를 흥겨운 멜로디에 녹여내 대중음악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1집 앨범은 70만 장이 팔리며 신인치고는 상당히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방송 3사의 신인상, 10대 가수상, 신세대가수상을 석권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1집 때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1993년 12월쯤 2집 앨범을 발표했다.
후속작의 타이틀곡은 혼자만의 사랑이었지만 레게 리듬을 도입한 하우스 댄스곡 핑계가 소위 길보드차트라 불리는 불법테잎 노점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대박을 쳤다.
이 곡 하나로 단숨에 '노래좋은 인기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위상이 급상승했다.
가요톱텐 골든컵을 또 다시 차지하는 건 물론이고 1994년 초반을 사실상 그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발매하려던 수많은 인기가수들의 음반이 연이어 미뤄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에 불과할 정도다.
1집에서 '재즈'와 '소울'을 알렸다면 2집에서는 자메이카 '레게'를 전국에 알리면서 이후 1994년을 '레게 열풍의 가요계'로 만들만큼 대중음악사에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타이틀곡 핑계로 골든컵을 또 다시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후속곡 혼자만의 사랑으로 김건모표 발라드를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애절한 발라드도 잘 소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앨범마다 유명한 발라드곡을 매 앨범마다 남길 정도로 이후 그의 음악 커리어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으로 180만장을 기록하면서 1994년 음반판매량 전체 1위를 차지했음은 물론이요, 방송 3사 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에서 모두 대상 수상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커리어 하이는 3집이었지만, 1위와 대상 수상에 있어서는 2집의 기록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였다.
이때 10대부터 40대까지 트렌디를 쫒는 신세대와 트로트, 성인가요를 즐겨듣는 구세대까지 골고루 인기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이 인기는 다음 해인 1995년 2월 발매된 3집까지 이어져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으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 바로 잘못된 만남. 이번에는 강렬한 유로비트의 하우스 장르를 들고 왔는데, 엄청나게 빠른 비트에 말하듯 외치는 랩과 후렴구의 숨쉴틈 없는 고음 폭풍이 쉴새없이 몰아쳐, 이후 1990년대 말까지 전국에 하우스 열풍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 곡이었다.
이 곡 역시 KBS 가요톱텐 5주 1위 골든컵, SBS TV가요20 6주 1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2주 1위라는 기록을 달성했고 KBS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잘못된 만남의 인기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났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에 '너에게', '드라마', '넌 친구? 난 연인!', '아름다운 이별' 등의 앨범 수록곡들까지 많은 인기를 끌게 되면서 1990년대 초중반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 가요계를 양분했다시피 했다.
이 당시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994년에는 영화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믹스'라는 제목으로 김건모가 미국 공연 도중 폭력조직에 납치됐다가 기지를 발휘해 탈주하는 과정을 엮은 코믹액션물. 미국 현지 로케까지 해가며 절반 가까이 촬영했지만 도중에 상대 여배우가 교체되었고 영화 완성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등 잦은 마찰로 결국 엎어진 망작이다.
그의 여러 큼직한 흑역사 가운데 손꼽히는 사건이지만 개봉은커녕 촬영 중에 중지된지라 천만다행으로 잊힌 흑역사. 그 전까지 가수들은 대부분 예능 출연을 자제했지만, 이와 달리 김건모는 예능 출연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당시 예능이 개그에서 토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에 편승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3집 잘못된 만남은 골든컵은 물론이거니와 무려 286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4,500만 명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할 경우 적어도 16명당 김건모 음반 1장은 사갔다는 소리가 된다.
이 대기록은 한국 기네스에까지 당당히 올라가, 가요계의 명예의 전당의 정점에 손꼽히는 앨범으로 남게 되었고, 팬들과 평론가, 대중성까지 모두 잡은 불후의 명반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다만 1~3집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것과는 별개로 김창환의 혹독한 프로듀싱과 사생활 관리, 김건모의 유별나게 자유분방한 성격이 부딪히며 불화가 겉잡을 수 없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성격이 둘 다 불과 같은데, 한번 뭉쳐진 응어리가 결국 맞불로 번지면서 더 이상 김창환 사단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리스크가 그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결국 3집 활동을 끝내고 최정상에 올랐을때 그를 정상에 올려준 은인이자 가장 많이 괴롭히고 혹사시켰던 김창환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
김창환 역시 공개적으로 그를 저격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아낌없이 드러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고 나중에 와서 다시 화해하면서 그 당시의 일들은 현재로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편이다.
6. 4~6집: 성공적인 홀로서기, 하지만 떨어지는 뒷심
3집 활동 이후 그는 당대 가요계의 미다스의 손 김창환의 라인기획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가요계에 충격을 주었다.
뮤지션으로서 지향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강력한 상업성으로 호불호가 존재하던 김창환에게서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을 위한 홀로서기에 나선 것.결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프로듀싱한 4집 'Exchange'는 1996년의 별들의 전쟁 시기에 발매했고, 최준영, 솔리드의 정재윤 등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이 시기가 매우 큰 슬럼프였다고 하는데 2~3집 당시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한데다 김창환과 대판 싸우고 나가면서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쳐있었던 상태였고, 워낙 큰 히트를 연이어 기록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네가 김창환 떠나서 잘 될 것 같냐' '넌 김창환 덕에 뜬 거지 네 능력은 제로야'라는 말을 매우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수 생활을 은퇴해야 하나하는 기로에 설 정도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으나, '내 스스로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심혈을 기울여 앨범을 제작했다고 전해지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매 앨범마다 변화하던 그의 음악적 성향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감을 보내면서, 4집이 발매되자마자 타이틀곡 스피드를 비롯해서 제대로 된 활동이 없었던 수록곡들(미련, 악몽, 빨간우산)까지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크게 사랑받았다.
앨범 수록곡들도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과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방향을 적절히 섞어 많은 호평을 받았고, 김창환을 떠나도 그 스스로 훌륭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다만 타이틀곡에 있어서는 전작 '잘못된 만남'을 의식한 선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는데, 실제로 매번마다 조금씩 달라지던 타이틀곡의 패턴이 스피드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 다소 실망감을 나타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워낙 전에 다져놓은 기반이 단단했던 덕분에 스피드 역시도 골든컵 달성이 유력해 보였으나, 4주 1위를 달성하고 대기록을 세우기 직전 자신의 전 소속사의 신인 가수에게 정상 자리를 넘기는 바람에 조용필에 이어 정규앨범에서 4장 연속이자 4년 연속으로 골든컵 수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게 매우 큰 화제가 되었고 본인 인기의 하락세를 알리는 전환점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 타 방송사에서도 3주 1위, 2주 1위에 그치는 바람에 1위 수상기록으로만 따지면 전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동명의 MBC 프로그램 오프닝 삽입곡으로 유명한 '테마게임'을 히트시켰고 또 다른 활동곡인 '악몽'과 '미련'도 준수한 인기를 얻으면서 160만 장의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KBS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최고가수상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3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핑계-잘못된 만남-스피드라는 최절정 전성기의 마무리를 지었다.
이후 1997년 12월 발매된 5집 'Myself'에서는 최준영 대신 윤일상, 방시혁 등과 손잡으면서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음악적 방향도 바꾸었다.
앨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본격적인 프로듀서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앨범으로, 두 번째로 직접 프로듀싱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진보한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한 흑인 음악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으나,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사랑이 떠나가네'를 활동곡으로 선정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전과는 조금 타이틀곡의 방향이 달라졌는데, 1~2집의 실험적 성향 타이틀곡, 3~4집의 트렌드에 맞춘 타이틀곡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5집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쿵짜자 쿵짝'거리는 트로트 비트를 기반으로 한 타이틀곡이었다.
사랑이 떠나가네 역시 마찬가지로 다소 올드한 느낌의 리듬이 쭉 이어진다.
갑자기 올드한 느낌의 곡들로 활동방향이 바뀐 이유는 데뷔 초~최절정기인 1990년대 초중반에는 트렌디한 느낌의 재즈, 소울, 레게, 하우스 등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이 개척한 장르가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장르의 가수들이 급격하게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감이 있었고, 김건모 본인의 나이도 30대에 접어들면서 대중가요 주 소비층인 10~20대층에선 다소 밀려난 듯한 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핑계' '잘못된 만남'을 통해 트렌드에서 멀어졌었던 30~40대에도 큰 인기를 끌며 '국민가수' 타이틀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값을 바탕으로 상대적 고연령층을 타겟으로 방향을 살짝 옮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예전 3~4집만큼은 못 해도 초창기에 활동한 '당신만이'와 '사랑이 떠나가네'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각각 10, 3위까지 오르면서 선전했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쓸어담고 110만장을 판매하면서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2년 후인 1999년 11월 발매된 6집 'Growing'은 뛰어난 작품성과는 달리 49만 장에 불과한 저조한 판매량과 미비한 홍보로 대중적으로는 처절하게 묻혔고 가요 차트에선 10~20위 권 정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전성기였다.
이미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던 김건모는 그가 원하는 음악을 아낌없이 이 앨범을 통해 보여주었고, 왜 그가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실패했지만 평단 역시 김건모의 변신과 새로운 시도에 호의적이었다.
다만 음악적으로는 현재까지도 3집과 더불어 그의 최고작으로까지 평가되는 6집이 상업적인 면에선 별다른 흥행을 하지 못하자, 그는 고심 끝에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7. 7, 8집: 제2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
2001년 김건모는 4집 때 호흡을 맞췄던 최준영과 함께 대중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7집 'Another Days...'에서 완벽히 재기하며 자신의 전성기였던 2~4집에 버금가는 반응을 얻었다.
애절한 발라드 타이틀곡 미안해요와 코믹한 댄스곡 짱가,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 Double, 1964년 발표되어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성인가요 빗속의 여인까지 크게 인기를 얻으며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4집 이후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며 음악프로에서 여러 번 1위를 수상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의 3배 가까이 뛰어올라 143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 해 이미연의 연가(컴필레이션)와 god에 이어 최종 3위에 올라 다시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한동안 뜸해졌던 예능계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해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반면 대중의 호응과는 별개로 활동곡인 '짱가'와 '빗속의 여인' 등에서 나타난 음악적인 퇴행은 음악 마니아들의 많은 안타까움을 샀다.
이전까지 흑인 음악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면, 6집에서 실패를 맛본 이후 기존 행보와 너무나 반대되는 대중적인 행보에, 이미 데뷔 10년차로서 자신의 팬층 나이대가 올라간 것까지 감안하여 30~40대의 성인 취향의 곡들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리메이크곡 두 곡을 합해도 트랙 수는 9개에 불과했고, 실제 신곡은 겨우 7개에 그쳤다.
이전 5, 6집에서 15트랙까지 꽉꽉 수준 높은 곡들로 채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성도였고, 이쯤되면 대중가요 음반시장의 마지막 절정기로서 대부분의 가수들이 못해도 12트랙 이상, 많으면 20트랙 가까이 채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곡 수에 있어서도 날선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스티비 원더'스러운 음악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팬들과 평단에서는 냉정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당시 MBC 음악캠프에서 문차일드의 '사랑하니까'에게 정상 자리를 넘겨준 직후, '음반판매량이 나의 1/10에 불과한 신인 가수가 어떻게 1위를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음악방송 순위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MBC 방송출연을 일절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방송사와 큰 마찰을 빚었다.
또 연예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대중적인 호감도를 크게 깎아먹었다.
이때 저지른 사건으로 김건모는 스타병에 걸린 유아독존 지멋대로의 연예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아직까지도 이 꼬리표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존재할 정도로 이미지를 크게 실추하게 되었다.
다만 대중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저랬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방송 순위는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수시로 바뀌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 순위의 기준점 때문에 공정성을 잃은 상태였다.
문차일드의 소속사가 바로 그 유명한 김광수가 운영했던 GM기획이었으며, 이 소속사의 간판스타 조성모를 띄우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대형기획사에 의한 힘의 논리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또한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 반기를 든 대다수의 연예인은 그들을 움직이는 언론, 정권, 조폭계의 실세에 의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었던 경향이 강하며, 김건모 자신도 그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했다.
가요계의 거물이자 큰손인 만큼 그를 견제하는 정경계와 어둠의 세계에서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순위제 도입 때부터 2001년 상반기까지의 가요 순위제는 대부분 방송 횟수나 시청자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팬덤이 많은 가수들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음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중성의 지표는 그 당시로서는 음반 판매였지만, 이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았다.
그 예로 1996년에 신승훈의 5집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 순위제에서는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다.
또한 투표라는게 조작이 매우 쉬운 분야고 인터넷이 덜 발달한 당시에는 그것이 더욱 쉬웠기 때문에 김건모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중들 또한 납득하기 매우 힘든 순위 결과였다.
그 뒤 음반과 음원 분야 점수는 2001년 하반기부터 도입되었으며 그 덕분에 2001~2004년까지는 아이돌보다는 비아이돌에게 1위가 많이 돌아갔다.
당장은 음악성과 인기를 등가교환한 셈이 되었고 위에 거론된 사건들과 이후 음반 시장의 침체로 7집이 그의 마지막 밀리언셀러가 되었지만, 한순간에 인기가 사그러들진 않았고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8집까지 지속됐다.
2003년 2월 발매한 8집 'History'에서는 앨범 메인 자켓에서 연탄사진을 실어 대놓고 올드 팬들을 겨냥한 듯한 인상을 주었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애절한 발라드곡 청첩장을 타이틀로 삼았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7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으로, '미안해요' - '청첩장'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라인을 비롯하여 '짱가' - 제비로 이어지는 코믹한 후속곡에, 심지어 오래된 고전가요를 리메이크하여 행사와 나이트 위주로 인기를 끌은 '빗속의 여인' - 아파트 라인까지 동일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을 밀었던 'Double'과는 달리, 이미 댄스 장르가 사양화되던 시기였던지라 자전적 가사가 담긴 소울곡 My Son을 또다른 후속곡으로 삼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앨범이었지만, 어릴적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가사로 실은 'My Son'은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방향성을 다시 살린 곡으로 높은 호평을 받았다.
7집에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지만, 순위제 방송사에선 많은 피해를 봐서 체감 인기와 음반 판매량에 비하면 1위 수상 기록은 매우 부실했는데 케이블 '쇼 뮤직탱크'에서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청첩장' 3주 1위, 지상파 SBS 인기가요에서 4월 6일 - 'My Son' 1위 수상이 전부였다.
일단 전작에서 MBC를 두 번이나 물먹인 전력이 있어서 음악캠프 측에서는 아예 1위를 할 수 없도록 대놓고 견제를 당했다.
물론 그 사이에 어찌저찌 MBC 화해를 했기 때문에 예능과 음악방송에 출연할 수는 있었지만 청첩장의 인기를 누를 정도로 막강한 경쟁자가 딱히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고작 1위 후보에 머물렀다.
또한 KBS 뮤직뱅크에서는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1위가 가능한 지상파 방송은 오로지 SBS 인기가요 뿐이었음을 감안하면 8집도 어느 정도 많은 인기와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타이틀곡 '청첩장'은 지상파 1위는 하지 못했으나 케이블 순위제 프로인 '쇼 뮤직탱크'에서는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3주 1위를 했으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도 높은 순위에 랭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김건모표 발라드에서도 자주 손꼽히는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삼속곡으로 선보인 '제비'는 순위제를 운영했던 음악캠프에서 1위 후보까지 오르는 등 선전했다.
이 앨범으로 대략 53만 장을 기록하면서 2003년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가져가는 영광을 얻었다.
이는 앨범 발표 당해 년도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것은 1995년 잘못된 만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쉽게도 음반 산업의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김건모가 메이저에서 남길 수 있었던 '국민가수' 타이틀에 걸맞은 마지막 성적이었다.
또한 그의 8집 앨범이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한 해 동안 판매된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 단일 앨범이 되었다.
이 시기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8집 앨범 활동을 마치고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음반시장의 악화와 방송활동과 음반홍보를 통한 후배 가수들과의 경쟁에 염증을 느끼고 공연활동으로만 팬들과 만날 것이라 밝히게 된다.
이 이유로 인해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와 음반 판매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골든디스크 대상이 99% 확실시 되었음에도 불참하면서 수상자리를 조성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조성모는 당시 <피아노>를 타이틀 곡으로 한 5집 <가인>으로 4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2003년 음반 판매량 3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2위 이수영의 경우 앨범이 8월에 발매되어 12월에 들어서 조성모 앨범판매량을 추월했고, 골든디스크 음반판매량 집계 기준은 2002년 12월~2003년 11월까지였다.
따라서 김건모가 불참, 이수영이 역전 직전의 상황에서 3위였던 조성모가 정말 운 좋게 간신히 수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성모가 수상 소감으로 방송에서 은퇴하셨지만 이제 콘서트장에서 그를 열렬히 사랑해 주시기 바란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한 적이 있다.